
정치적 정의로 기독교적 공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회에 이어 4월 9일 개봉한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를 다룹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및 감독 토드 코라르니키(Todd Komarnicki), 등장인물은 디트리히 본회퍼 역 요나스 다슬러(Jonas Dassler), 마르틴 니묄러 역 아우구스트 딜(August Diehl), 카를 본회퍼 역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Moritz Bleibtreu), 파울라 본회퍼 역 나딘 하이덴라이히(Nadine Heidenreich) 등 독일 배우들이 맡았습니다. -편집자 주
정의, 구약성경에 쓰이는 개념
하나님 율법에 의해 규정된 것
공의, 신약성경에 쓰이는 개념
영원하고 보편적인 善의 기준
정의, 기독교적 공의 하위 개념
공의 구체적 실천 원리가 정의
민주주의적 정의와 기독교적 공의의 차이는?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미국 저명한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우리 시대에 던졌던 질문이다. 샌델의 정의는 세속주의 정치철학과 윤리학 관점으로 규정한 개념이다. 이러한 정의는 인간이 규정한다. 그렇기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기독교에도 '정의'라는 개념이 있다. 주로 구약성경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대하 31:20)" 같은 성구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정의는 샌델의 철학적 정의와 달리, 인간이 규정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규정된 정의다.
이런 맥락에서, 신약성경에서는 '정의'란 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에 상응하는 공의(righteousness)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공의란 하나님께서 옳다 여기시는 바, 영원하고 보편적인 선의 기준을 말한다. 이를 유념한다면 공의와 정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도 있다. 공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히 불변하는 보편적 선의 원리이고, 정의는 이 공의를 현실 사회에 적용하는 구체적 실천 원리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적 공의의 하위 개념인 기독교적 정의는 공의의 내용을 벗어날 수 없는 제약을 갖게 된다. 마치 법률이 헌법에 근거해 제정되고, 헌법에 위반되는 법률은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기독교인은 그래서 늘 공의를 살피면서 정의의 실행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날 세속주의 사회에서는 공의란 개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정치제도로, 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의는 당대 국민들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 국민주권과 인권보장 원리에 어긋나는 폭정에 대해 불복종과 저항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실제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혁명의 가장 중요한 방편은 시민 봉기와 전투였다. 민주주의의 정의는 폭력 사용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의는 여러 측면에서 기독교적 공의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 가장 뚜렷하게 상반되는 측면이 바로 정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행위에 대한 태도다. 기독교적 공의는 원칙적으로 정의를 위한 폭력의 동원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일부 극단적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교파들처럼 군 복무나 정당한 방어전 수행까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방식으로 권력을 장악한 권세자들에 대한 봉기나 테러 행위는 기독교적 공의가 허용하는 정의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는 권세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서, 자칫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거역하는 데까지 나아갈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정의 구현을 위해 '검은 오케스트라'에 가입한 본회퍼.
본회퍼 초기·중기 사상, 기독교
공의 바탕 공동체·타자 윤리 부각
2차대전 발발 후, 사상 급격 변화
정치적 정의 구현 위한 자기희생
하나님의 공의인지 반성할 필요
신앙인들 정의 모색에 오해 초래
'비종교적 기독교'로 대표되는 본회퍼 신학의 불연속성
불의한 권세에 대한 폭력 혁명과 저항을 금하는 데는 두 가지 신학적 근거가 존재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 학정을 펼친 권세자들에게 징벌로 되갚아 주실 것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웃을(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 계명이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희대의 폭군이자 학살자 히틀러를 징벌하는 세속적 정의 구현에 자신의 생애를 바친 본회퍼 목사의 일대기를 절절한 심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이 감동적이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는 기독교적 공의와 민주주의적 정의의 경계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명한 본회퍼 연구자 존 갓세이(John D. Godsey)는 신학자로서 본회퍼의 사상을 크게 초기, 중기, 후기 세 부분으로 나눈다. 본회퍼 신학 초기(1927-1933)는 주로 '신학적 기반 마련' 시기, 중기(1933-1939)는 '신학적 적용' 시기, 그리고 후기(1939-1944)는 '신학적 단편들'의 시기였다.
본회퍼의 초기 및 중기 사상에는 기독교적 공의에 밑바탕을 둔 공동체 윤리, 타자 윤리가 주로 부각된다. 반면 후기 사상에는 기독교적 공의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비종교적 기독교'의 정의 개념이 대두된다. 초기와 중기 사상에는 확고한 연속성이 있는 반면, 후기 사상에서는 이전 시기에 찾아보기 어려운 불연속성이 확인된다.
1938-1939년 당시 본회퍼 신학, 즉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기 본회퍼의 신학은 기독교적 공의와 민주주의적 정의를 구분하던 원래 입장을 포기하고, 양측의 융합을 시도하는 급격한 태세 전환을 보인다.
▲1938-1939년 당시 본회퍼 신학, 즉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던 시기 본회퍼의 신학은 기독교적 공의와 민주주의적 정의를 구분하던 원래의 입장을 포기하고 양측의 융합을 시도하는 급격한 태세전환을 보인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본회퍼를 둘러싼 삶의 정황의 급격한 변화가 결정적 영향을 줬다. 1938년 본회퍼는 히틀러 정권 전복을 계획한 '검은 오케스트라'에 가입했고,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본회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상정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끔찍한 상황이 도래했던 것이다.
격변에 휩쓸린 본회퍼는 어떠한 이유로든 타자에 대한 강압적 판단과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던 이전의 신학적 입장을 포기하고, 민주주의적·사회적·세속적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펼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신념을 내세우게 된다. "미친 자가 붙잡은 운전대"는 이런 그의 변화된 생각을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는 본회퍼의 이런 신학적 전환과 그의 정치적 정의구현을 위한 자기 희생을 순전한 기독교적 제자도의 표본으로 내세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과연 성경 중심의 복음적 기독교 신앙 입장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하게 받드는 것인지 진중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의거는 분명 세속적이고 정치적 의미로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기독교계에도 이렇게 정의로운 삶에 목숨을 건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널리 '홍보'하려는 신학계의 의도는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이 있지만, 그 정의가 기독교적 공의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인지 반드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 <본회퍼> 논조가 그러하듯, 정치적 순교자와 기독교의 순교자를 혼동하는 처사는 정치적 불의에 대한 신앙인들의 정의로운 대응 모색 과정에서 자칫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계속>
▲영화 <본회퍼>의 논조가 그러하듯, 정치적 순교자와 기독교의 순교자를 혼동하는 처사는 정치적 불의에 대한 신앙인들의 정의로운 대응 모색 과정에서 자칫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박욱주 교수.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