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학교 석좌교수이자 국제옥수수재단(ICF) 이사장인 김순권 장로(포항 수정교회, 평양 칠골교회 명예장로)는 한국의 옥수수와 미국의 옥수수를 교배해 크기도 훨씬 더 크고 병충해에 강한 옥수수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옥수수 수확량이 늘면서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사명감으로 옥수수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본지는 김순권 박사가 옥수수를 개발하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 그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올해 1월 일본 북해도 삿포로에서 개최된 국제 에너지학회에서 기후변화 차단을 위한 '리피'(leafy)와 '비엠쓰리'(bm3) 옥수수에 대해 발표했다. 리피 옥수수는 보통의 옥수수보다 잎이 7개 더 달리는 것으로, 바이오 에너지와 슈퍼 가축사료로 사용된다. 비엠쓰리 유전자 옥수수는 옥수수 줄기와 잎의 리그닌이 20% 낮아, 가축이 먹었을 때 소화율이 20% 높다. 미국과 중국은 기후변화를 막고자 각각 전체 생산되는 알곡의 40%와 10%로 바이오 에탄올을 생산해 이산화탄소 줄이기 운동을 한다.
한국에서는 행전안전부의 '아세안(ASEAN) 국가들을 위한 식량안보와 평화' 과제로 연구비를 지원 받아 포항과 캄보디아 ICF 바이오센터에서 '리피(leafy)+비엠쓰리(bm3)' 육종에 대한 연구를 추진 중이다. 이 과제가 성공하면 수억 톤의 옥수수 알맹이가 식량과 가축사료, 산업용으로 사용돼, 기후변화 차단과 세계 식량위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축산사료 옥수수 자급률이 0.8%인 것을 감안할 때, 농업의 일대 혁명이 올 수도 있는 과제다. 세계 최초로 시도하는 육종 연구라 매우 어려운 가운데 도전 중인데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코로나로 3년간 북한과 중국 옥수수 육종을 못하다, 처음으로 중국 흑룡강성 제2도시의 육종 회사와 MOU를 맺고 북한과 중국 동북 3성의 옥수수 육종을 위해 2,000여 종의 유전 자원으로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15년간 육종한 중한슈퍼옥수수와 새로 중국 회사에 의해서 육종된 조생다수성과 교배로 북한과 중국의 옥수수 혁명을 기대하고 있다. 4년 만에 몽골을 방문했을 때, 800년간 가축을 따라 움직이는 "유목 축산"에서 옥수수 사료 생산으로 "정착 축산"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을 확인했다. 몽골은 캐시미어의 과잉 생산으로 염소의 사육 수가 크게 늘면서 인구 350만 명에 7,000만 두의 가축이 사육되고 있다.
▲20년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타 대통령과 농업장관과 새로 개발한 Kim-Dino 하이브리드 전국 보급 행사에 참석했다. ⓒ김순권 박사 제공 |
1998년에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된 동티모르에 "NAI"(현지어로 '명예'라는 뜻) 옥수수 품종 개발로 주식인 옥수수가 전국적으로 보급됐고, 경북대학교 제자 글라디노 박사와 안전하고 다수확이 가능한 하이브리드콘(hybrid corn) 2품종을 공동 육종해 "Kim-Dino Hybrid Corn #1 & #2"라 명명했다. 이날 전국 보급 행사에는 동티모르의 라모스 호타 대통령도 참석했다. 또 10년 걸려 성공한 당뇨 치료 한동블랙콘이 충북 제천 농가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971부터 1974년까지 미국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 중 미국이 잘 사는 이유가 교잡종 하이브리드콘이라는 것을 보고 가난한 조국 대한민국의 보리고개 해소를 위해 목숨을 걸고 관련 기술을 배웠다. 하와이 열대 농업대학원에서 1년간 공부하고 본토 일리로이스대학교 대학원 병리학과에서 석사공부를 할 당시인 1982년 8월, 서울에서 대홍수가 났다. 중량천이 터져 서울의 일부가 물 속에 잠겼을 때 아프리카 흑인 친구가 "한국에 대홍수가 나서 너의 민족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미국에서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 전부를 20 달러만 남기고 박정희 대통령님께 보냈다.
절대 비밀로 해 달라고 보냈는데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대신해 감사 편지를 보내 주셨다. 당시 난 4급 말단 연구직 공무원으로서 가난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옥수수 공부를 계속했다. 서울시청 뒤 토플 공부하는 시사학원에서 만난 한은실(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 학과생)이 대학 졸업 후 하와이로 건너와 호노룰루 기아우모쿠 한인감리교회에서 부모님 없이 결혼을 했다. 이한빈 EWC 연구소 소장이 신부 아버님 대행을 했다. 유학 중 낳은 첫째 아들 김용철은 지금 뉴욕에서 넥스트점프(Nextjump)라는 IT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결혼도 미루고 애기도 낳지 않은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해서 귀여운 아기도 낳고 애국하시길 바란다.
하와이대학교와 동서문화센터에서 3년 3개월 만에 석·박사학위를 마친 후 세계 제1의 종자회사 파이오니오콘 인터내셔널이 월 3,000 달러에 스카우트 제안을 해 왔다. 그러나 난 이를 거절하고 박사학위 수여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월 48 달러의 국가공무원직인 농촌진흥청으로 귀국했다. 일주일이라도 더 나라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였다. 귀국 3년 만(1997년)에 아시아 최초로 강원도에 적응한 황색종 옥수수 "수원19호", "수원20호", "수원21호"를 개발해 농가 소득이 3배나 증대되도록 도왔다. 강원도에서만 연 400억 원의 소득이 증대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메디안 카토록 신부님이 나병환자를 위해 죽어 가신 하와이 몰로콰이섬에서 난 한국의 옥수수를 개발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강원도 농가들이 새 품종 옥수수 덕분에 지붕과 담장을 고치는 것을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수원 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 시무) 새벽예배를 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이 축복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새마을운동 노래를 부른 기억이 생생하다.
현재 미국보다 옥수수를 1000만 헥타르 더 재배하는 중국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77년 방콕 아시아태평양지역경제의사회(ESCAP)에서 국교도 없는 중국과 소련이 하이브리드콘 기술 전수를 요청했다. 앞서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과 필리핀이 한국서 성공한 하이브리드콘 기술를 전수받았는데, 한국과 중국은 형제 국가이니 도와 달라고 했다. 1974 하와이대학교 박사 학위 졸업 때 나이지리아 소재 국제열대농업연구소(IITA)에서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는 아프리카를 구해 달라며 아프리카 대륙을 위한 옥수수 연구를 요청했다. 난 조국 한국에서 하이브리드콘을 성공시키고 도와 주기로 약속했다.
▲김순권 박사가 아프리카 대륙을 위해서 개발한 '왕슈퍼 1호' 사진이 뉴욕 스미치온 박물관 콜롬버스 미대륙 발견 500년 기념책자 표지에 실렸다. ⓒ김순권 박사 제공 |
1979년 "우리 민족이 받은 사랑의 빚을 아프리카에서 옥수수로 갚는다"는 심정으로 가족과 같이 아프리카로 떠났다. 풍토병 말라리아가 만연한 아프리카에서 적응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연구소에서 1주일간 출장을 떠날 때는 내가 살아서 돌아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5살 때 아버지가 고기를 잡기 위해 울산 앞바다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실 때 어머니가 싸주신 소주 한 병과 담배를 전해 드리면서 하나님께 아버지가 무사하게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착 다음 날부터 아프리카 환경에 적응하는 저항성 옥수수 품종을 육종하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는 옥수수 위축바아러스병(MSV), 악마의 풀(Striga)과 가뭄이었다. 공생저항성 품종을 95%만 강하게 육종해서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대륙으로 보급하게 한 것 모두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옥수수 연구에 어려울 때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생각했다. 내가 5분만 옥수수 연구를 잘하면 5,000명의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만 배우면 아프리카도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 도착 6개월 만에 IITA 연구소 미국인 소장인 빌 갬블(Bill Gamble) 박사가 일본 희로시마 원폭 피해 기념식에 초대를 받아 일본을 방문한 후, 수원 농촌진흥청에 들려서 당시 김인환 청장님에게 아프리카를 살리기 위해서 옥수수 육종 전문가 김순권을 아프리카에서 일하게 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래서 아프리카 대륙을 위한 희생을 계속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데 가축 퇴비가 정말 중요한데,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였던 이 나라들은 소똥을 무서워하고 양계장에서 나오는 퇴비를 밭이 아니고 길가에 버렸다. KBS 제1회 해외동포상 산업기술 분야 수상자로 선정돼 현지 찰영을 할 때, 나이지리아 북쪽에서 직접 손으로 소똥을 만지며 퇴비를 땅에 묻는 연기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