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3월 첫주 예배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무의탁 교우의 장례가 있었던 주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나는 연고지가 없는 분들의 장례를 수없이 모시면서 그가 누구인지에 따라 슬픔에도 등급이 매겨지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없는 것일까. 나와 남편은 여느 때처럼 최고의 예의와 최고의 대접으로 마지막을 보내드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교회를 몇 번 출석 했는지는 문제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비용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았으므로 회의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 날 예배 후,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었다. 몸이 이상했다.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식은 땀을 비오듯 흘리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꼬박 한달을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체중은 30파운드가 빠져 나갔다.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모른다" 혼잣말을 하며 죽음을 생각했다.
성도들이 몰라서 다행이었다. 제 살기들도 힘이들텐데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20년 동안의 미국살이가 녹아 내렸다. "나는 장례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장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몸은 의학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실험실습용으로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나를 위해 싸구려 관 한짝도 마련하지 마시며, 누구도 찾아 오는 것을 사양합니다. 나를 위한 어떤 수고도, 기억하는 일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왔던 길로 조용히 가겠습니다. 살아 온 인생 전부가 감사였고 은혜였으므로 행복했습니다. 'Jesus remember me' Margie 할머니가 가시던 날 내가 불러 드렸던 짧은 이 찬양을 몇 번만 불러 주십시오."
4월이 익어갈 무렵 비틀거리며 교회로 향했다. 내가 기도하던 자리에는 방석이 그대로 있었다. 문닫은 교회는 쓸쓸하기만 했다. 잔디는 허리춤까지 자라있었고 꽃나무들과 정원의 과수들은 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마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기 이름과 얼굴을 내미느라 야단들이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이름을 내고 싶은 것은 매 한가지구나" 중얼거렸다. 2020년 한 해, 코로나는 영화, '리바이어던'의 괴물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하나님은 문명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는 세상을 향하여 '멈춤' 을 선고하신 것이다. 욥의 고난 앞에 침묵하신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평안과 고요속에 주님의 임재가 내 안에 있었다.
교회는 북 버지니아 남단, 미국에서 두번째 큰 육군부대와 맞닿아 있다. '가나연합감리교회'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헐렁한 경계선으로 짐승들만이 경계를 허물며 넘나든다. 교회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어 지내던 '아둘람굴'과 다르지 않았다. 교인들은 외딴 섬에 떠밀려 온 사람들이었다. '땅끝, 랜드막!!' 나는 그곳에 있었다. 아둘람굴에서는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배고픈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오해의 생활화, 쏟아지는 비난들, 멈추지 않는 싸움질' 도 먹을 때에는 그쳤다. 나는 코가 넘치도록 배불리 먹였다. 코로나 시기에도 누워 있던 한달을 제외하고 애찬관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들이 용사가 되어 교회를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 17년이라는 짧은 교회 역사에 비하면 10년이 지난 교우들이 절반을 넘고 15년이 훌쩍 지난 교우들까지, 이제는 서로에게 피붙이가 되었다.
사회적 사교모임도, 비지니스 덕을 보기 위해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빌려 줄 어깨도 없는, 모두가 강도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개척멤버이자 목사의 아내다. 교회 100미터 근처에 쉘터가 있고 10분거리에는 시니어 아파트가 있다. 근처에는 쓰레기 매립지가 있고 이전한 교도소가 가까이 있었다. 사람들은 한인교회를 상상할 수 없는 지역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편은 개척당시 여러 선후배 목사님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모두가 아니라고 했었다.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었다. 조감독님만은 "모두가 가는 길이 진리의 길이 아니며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진리를 쫒아 가는 길" 이라고 말씀하셨다. 남편은 그 길을 선택했다. 무모한 결단은 사람보기에는 어리석은 일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그것과 달랐다. 성도들은 육두문자를 쓰며 싸우는 일이 빈번했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었다. 누구랄 것도 없없다. 상상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고 기암을 할 만한 사건들이 잦아지면서 가슴 통증을 자주 느꼈다. 나는 점점 병들어 가고 있었다.
남편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녔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홈리스들, 행려인들, 시니어들, 병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들어주고 싸매주고 돌봐주고.....주저하지 않았다. 깨어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았다. 등록한 홈리스들을 돌보는 일도 쉘터에 음식을 나누는 일도 그와 나의 몫이었다. "왜 우리죠? 왜 우리교회 인가요?" 하나님께 물었다. 나는 내 고통을 감당하느라 그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도 위로 받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면 나는 내가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가도 참아 내야 했다. 나는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침상이 젖도록 땀을 흘렸다. 갈수록 사람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놓았다. 한번만 이사를 해 보거나, 교회를 옮겨 보았으면 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KMC에 있었을 때, 타주에서 청빙이 있었다. 그 지역에서 두번째 큰 교회라고 했다. 남편은 어려운 교회를 두고 조건이 나은 교회로 옮기는 게 죄스러워 거절 했었다. 나는 UMC로 온 것을 후회했다. 한국에서도 딱 한번 교회를 옮겼다. 첫 파송지인 시골교회에서 서울의 한 대형교회의 부교역자로 이동이 전부였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써 넣고 싶은 것은 욕심이었다.
나는 위태로운 사역지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내 앞에 Covid-19 이라는 괴물이 찾아왔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였다. 죽기전에 마지막 봉사를 결심했다. 뱀이 나올 정도로 자라버린 1.5에이커의 교회 잔디밭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털썩 주저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남편은 팔을 끌어 말렸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홈리스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봄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나는 자고나면 한 뼘씩 자라있는 잔디 때문에 아픈 줄도 몰랐다. 내가 일하는 게 아니었다. 바람이 뒤에서 밀어주고 구름이 무등을 태워 대신 일해 주었다. 나는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무엇이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교회문은 닫았으나 하늘문은 열려 있었다. 기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충성스러운 권사님 한분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직장암이라고 했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데다가 다른 지병을 가지고 있어서 수술이 불가능했다. 남편은 곧장 기도원으로 향했고 금식을 시작했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금식을 했다. 누군가를 살리고 대신 죽을 수 있는 마지막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성공적으로 수술하고 퇴원할 수 있었다. 밥 해줄 사람이 없는 그녀를 위해 나는 한달 동안 밥을 지어 날랐다. 식은 땀이 겹줄로 흘러 내렸지만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이웃교회에서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특별히 ㅅ교회 K목사님은 내 상황이 긴박할 때마다 그랬다. 다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이 아니었다.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되었다. 내 앞에 지나가는 배고픈 이들에게 무수히 밥을 먹였더니, 내가 배고플 때, 하나님은 신속하게 일하셨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걱정없이 아플 수 있었다. 이슬도 말라버린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날라주던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지나가던 조경회사 차가 8톤의 멀치를 공짜로 교회에 부려놓았다. 교회보다 큰 산이 넷이 생겼다. 우리는 새벽부터 땅거미 질 때까지 삽질을 했다. 높고 단단한 산은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허물어지고 마침내 산은 옮겨져 있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역사였다. 그것은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작고 연약한 믿음을 드렸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동산은 풍성해지고 열매들은 코로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라났다. 삽질은 살이 빠져 헐렁해진 근육을 단단하게 키우는 운동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교류가 없던 어느 분이 편지를 보내 왔다. "기도 중, 가나교회가 계속 떠올랐어요, 무슨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어보지도 않고 헌금을 보내드려요." 비가 새던 교회 지붕을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딱 그만큼이 필요 했었다. 여름장마에도 걱정없게 되었다. 세상은 코로나가 밀물처럼 덮어 버렸으나, 교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천에 과일이 익어가고 채소들이 자라났다. 교회 동산에 물을 주는 일이 낙이었던 불쌍한 교우 한분이 돌아가셨다. 또 장례가 났다.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고급진 도시락을 만들어 할아버지 배낭에 넣어드리고 영원한 나라로 소풍을 보내드렸다. 나는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었고, 하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 바쁘셨다.
교회 공터에 놀이터를 짓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없고, 코로나 시기에 누가 온다고 놀이터를 짓느냐" 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여름 땡볕에 땅을 파고 돌을 걸러내고 모래와 멀치를 덮었다. 빨간 지붕이 올라가던 날, 남편은 '드림랜드' 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이들이라야 고작 셋이었다. 한 가정이 한국에서 이민을 왔다. 입국도 어렵던 시기였는데 일사천리로 이민수속을 밟았다고 했다. 아이들 둘이 늘어 다섯이 되었다. 갈곳 없는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다. 새들이 지저기고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놀이터에서는 해 넘어 갈 때까지 웃음 꽃이 피어났다.
그즈음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교회 아름드리 나무들이 옆 건물로 넘어져 진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곱그루를 베어내는 큰 공사를 하게 되었다. 남편은 일군들을 돕다가 가장 큰 나무 밑둥에 팔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지게차가 와서 그의 팔을 꺼냈다. 팔은 멀쩡했다. 옆 건물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옆 건물은 '베트남 불교 미주본부' 이다. 그날, 나는 잔디를 밀다가 언덕배기에서 몇 바퀴 굴렀다. 위험천만 했다. 기계는 굉음을 내며 불꽃이 튀었다. '쾅 쾅!!' 나는 풀떼기들을 떼어내며 사뿐이 일어났다. 옆 건물 스님들이 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조용히 드러내셨다.
남편은 '전교인 50일 작정기도' 를 선포했다.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교회와 미국과 세상을 향한 애통의 마음을 주셨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우시는 주님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마침, 버지니아 주지사는 앞으로 3주 뒤부터 50명까지의 집합을 허용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날은 우리교회 '오십일 작정기도' 가 끝나는 5월31일 성령강림주일이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은 갈곳 없는 사람들의 예배를 받으셨다.
나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8월이 되어서야 병원에 가 볼 수 있었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약물치료에 들어갔다. 시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호르몬문제, 갑상선등 온전한데가 없었다. 몸에 부착하고 다니는 센서기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빨간불이 켜지고 뚝뚝 떨어지던 저혈당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치료는 속했다. 회색으로 보이던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땅위에서 물 위를 걷고 있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남편과 나란히 걷는 날이 많아졌다. 각자 살아내느라 서로 늙어 버린 것도 몰랐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려서부터 폐기능이 좋지 않았다. 앉아서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가파른 사역의 길을 지친 몸으로 달렸으니 쓰러질만 했다. 서너 걸음도 뗄 수 없었던 내가 언덕을 오르고 두 시간을 쉬지 않고 걷는다. 기적이다. 나는 이제 걷고 폴짝거리며 뛴다. 내리 달릴 수 있다. 폐기능은 몰라 볼 정도로 좋아졌다. "주여!"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 이름안에 능력이 있었다.
일년을 돌아보니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최악의 상황은 최고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님은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지 지켜보고 계셨다. 긴박하게 써 내려 갔던 유언장을 펴 보았다. 고통과 고난은 내 인생의 마침표를 의미하는 '정지'가 아니라, '시작을 위한 또 다른 출발'이었다. 나는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애 많이 썼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고생 많았어, 잘 견뎌 내었다, 수고 했어." 감사와 은혜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살아 있는 풀 한포기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물며 나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나를 묶어 놓았던 현실과 코로나도 나를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서 있던 벼랑 끝은 하나님이 만지시는 치유의 자리, 죽음을 생명으로 옮기는 자리였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예례미야29:11 말씀을 받들어 읽는다. 코로나는 나에게 재앙이 아니라, 소망이었다. 잔디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다시 시작이다. 4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