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 ‘행려병자의 아버지’ ‘바보 의사’, 혹은 ‘송도의 성자’로 불렸던 장기려 박사는 탁월한 외과의사였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을 치료하였습니다. 1940년대 김일성 맹장 수술을 집도했고, 김일성이 평생 장기려 박사를 존경하며 그리워했답니다. 그후 김일성은 신장결석이 걸렸을 때, 목 뒤에 혹이 났을 때, 무조건 장박사를 데려 오라고 했답니다. 또 장박사는 경성의전 부속병원 근무 시절 척추결핵으로 입원한 춘원 이광수의 주치의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춘원 ‘사랑’의 주인공 의사 안빈의 모델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의사가 된 장기려 박사는 평양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하다가 1950년 12월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했습니다. 그는 부산에 정착해 제3 육군병원 의사로 재직하는 한편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의료구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51년 7월 1일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 (거창고등학교 교장)과 한상동 목사(고신측 원로)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영도 제3 교회에서 무료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했습니다. 이 복음병원은 장박사의 지인이 미국에서 모금해 보내준 돈과 유엔이 지원하는 하루 50인분의 약, 그리고 장기려박사의 헌신으로 시작된 병원이었습니다. 미군용 야전 천막 3채가 진료소와 입원실, 수술실로 모두 사용되던 병원을 본 한 미군 의사는 ‘동물병원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장기려 박사는 25년 동안 이 병원의 원장을 맡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었습니다. 장기려박사가 복음병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그의 선행은 유명한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무료로 시작한 복음병원은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약간의 치료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치료비가 없는 사람을 보면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월급을 털거나 가불을 해서 대신 내주곤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어 가불할 월급조차 없게 되자 병원 직원들이 장기려의 월급에서 미리 치료비를 계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기려는 밀린 입원비 때문에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의 사정을 듣고 환자에게 몰래 속삭였습니다. “이따가 밤에 뒷문을 살짝 열어 놓을 테니 직원들 모르게 도망치세요.” 장기려 박사가 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복음병원 원무과에 근무했던 원로장로님에 의하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원무과에서 진지하게 병원비 때문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원무과로 보내 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원장님은 번번이 사고(?)를 치셨답니다.
장 박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큰 회사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했는데 강연 후 그 회사에서 수표가 든 봉투를 주었습니다. 회사 밖을 나오는데 거지가 나타나 도와 달라고 손을 벌렸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받은 그 봉투를 그대로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 거리의 천사는 그 봉투를 건네준 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받아 현금으로 바꾸려고 은행 창구에 갔더니 은행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큰 수표가 생겼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신사 한 분이 이 봉투를 내게 주어서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수표를 추적하니 회사가 장기려원장에게 강사료로 준 수표였습니다. 장박사를 존경하는 회사 경영진이 강사료에다 좋은 일 하시라고 큰 금액을 보태어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표를 도로 찾아가라는 연락을 경찰이 하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수표를 찾으러 가는 며느리에게 신신 당부하였답니다. “네가 그 돈을 찾아서 한 푼도 남김없이 그 가난한 사람에게 다 줘야지, 한 푼이라도 네가 집에 가지고 돌아오면 너는 내 며느리가 아니다!” 과연 장기려 박사다운 모습입니다.
가난한 환자와 영세 가족들을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 위해 1968년 5월 발족시킨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한국에서는 최초로 추진된 의료보험사업입니다. 부산지역 교회의 협조를 얻어 시작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통하여 ‘청십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세계의 선진국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의료 서비스 제도의 시초입니다. 늘 가난한 이웃을 생각했던 장기려 박사의 생각이 한국의 제도가 되어 병원의 문턱을 서민들에게 낮추어 준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의술도 탁월했지만 예수님을 닮은 믿음과 사랑의 나눔은 더 탁월했습니다. 그는 평생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환자와 환자보호자들의 어려운 형편을 보면 그냥 넘기지 못했던 장기려 박사는 가난했습니다. 평생 의사로 살았지만 집 한 채도 없어서 복음병원이 마련해준 병원 옥상에서 마지막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눔의 삶을 살다간 장기려 박사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믿음과 나눔의 유산은 한국 교회와 의료계를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나눔을 실천하고 나눔의 행복을 누렸던 성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