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2) 평생의 여정 

영적 성숙은 어느 순간의 뜨거운 체험이나 환상 또는 새로운 깨달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달려가야 할 장거리 여정이다. 어떤 사람은 며칠간의 산기도를 통해서나 특별 강사의 설교를 듣고 뜨거운 가슴을 경험한 후에 갑자기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서는 경우도 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설교자가 되어 복음을 외치는 것이다. 그의 기적적인 체험과 변화를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도 곧 영적으로 성숙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종종 신학적, 성경적 오류를 범하기 쉽고 또 각종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아이가 부모를 닮은 것이 어찌 하루 이틀 또는 한 두 달 만에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조숙한 아이라고 해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 정상이다. 영적 성숙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아무도 완전한 성숙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4:13-14).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바르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세상 풍조를 따라가거나 사람들의 말을 듣든지 그가 읽은 서적들을 통해서 일을 결정하고 행할 수 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가장 성숙한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도 바울도 그가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고 지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이 세우신 푯대를 향하여 달린다고 고백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2-14). 바울이 아직도 온전한 성숙에 이르지 못하여 계속 달리고 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결국 주님을 온전히 닮는다는 영적 성숙은 평생토록 쉬지 않는 긴 여정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영적 성숙은 기본적으로 주를 닮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 5:1). 구체적으로 주님의 무엇을 닮는가? 어떤 사람은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적인 일들도 닮을 수 있기를 바랄 때가 있다.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즉각 낫고, 소경에게 손을 얹으면 눈을 뜨고, 앉은뱅이에게 안수하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기 원한다. 물론 주의 이름으로 행할 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만, 영적인 성숙은 그런 것과 무관할 수 있다. 사역 중에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다른 측면에서 놀라운 인격적 또는 사람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영적 성숙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이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것을 통해서 재물을 많이 얻기도 하고 또 자신을 많이 드러내는 것을 본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모습이 될 수 없다.

성경이 그것을 경고한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전 2:9-12). 비록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불치의 병이 낫고 귀머거리가 듣게 된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통하신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속임수인지 우리는 판단하기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것에 속아서 바른 진리에서 떠나게 된다.

3. 영적 성숙이 왜 필요한가?

아이가 태어나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아무리 아기가 귀엽다고 해도 영원히 여린 아기로 남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어떤 아이는 정신 장애를 입고 태어나서 몸은 커가지만 정신적 성장이 멈추는 바람에 덩치가 큰 "어른 아이" 수준에 머무른다. 그것은 부모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성장하리로다" (시 92:12).

사람은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자기 몫의 일을 하고 나아가서는 가정과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이며 또 기대되는 것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어 갓 중생한 사람은 가장 시급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 신앙이 견고해지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어야 자신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고 남을 돌보며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온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 각처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요구된다.

1) 교회에 영적 지도자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다. 한국 민족은 원래 토속 종교와 각종 종교에 익숙한 백성이었는데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많은 해외 선교사들의 수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되었고 종교성이 강한 백성들 마읍 밭에 비교적 쉽게 심겨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자칫 잡초가 많거나 자갈돌들이 많은 땅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잠시 자라는 듯 하지만 주변의 여러 악한 조건 때문에 성장이 멈추거나 죽을 수도 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이면 얇은 땅에 뿌려진 씨들은 곧 말라버리고 죽는다. 마치 단기로 속성 훈련을 받고 치열한 전쟁터에 나선 군인같이 큰 위험 앞에 선 것이다. 충분한 훈련도 없이 폭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 나서는 용기는 대단하지만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한때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몰려와서 입학 결쟁율이 대단히 높았다. 일반적으로 4 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 3-4 년의 신학 공부를 하고 시험을 통해서 목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목사가 되어 많은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단기간에 걸쳐서 약간의 교육을 받고 목사로 나서게 하는 군소 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그것이 교회를 약화시키는 곰팡이처럼 된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여기 저기서 들은 지식으로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려고 하니 남의 것을 도용하는 사례가 많고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가르침도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 건물에 속한 방 하나를 대여하여 거기서 기독교 교단을 창설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겸용하는 곳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소형 신학교의 운영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근래에 아프리카의 몇 나라와 중남미를 선교 여행하면서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그들 목회자 대다수가 제대로 된 신학과 신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성경을 일부 아는 것으로 "간단하게" 목사가 된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한번도 제대로 통독하지 않고 목사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고 구원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도 바로 알지 못하면서 감정에 치우쳐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성경적 지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이나 신비 체험을 많이 말하고 막상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것에는 문외한과 같은 것이다.

성숙한 지도자가 부족한 곳에서는 각종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종교적 권위주의가 생기고, 교회 직분과 관련된 갈등이 많아지며 또한 이단 집단에 대한 대처가 미약하여 성경을 제멋대로 풀고 해석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장로와 권사와 집사같은 교회의 봉사 직분을 일종의 계급적 권세로 오해하는 일도 벌어짐으로써 교회 분열과 갈등이 잦아진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종의 권력 다툼도 일어나고 세력 갈등이 생기는 것은 주님보다 그들 자신이 교회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건강하게 바로 서기 위해서는 성숙한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