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한국 교회사에서 이북 지역의 신학교에 대해서는 "평양 장로교신학교"만이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감리교에서도 서울의 '협성신학교'(1907) 뿐만 아니라 평양에 남녀신학교를 설립하였고 특히 여성 사역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도 설립함으로 이북지역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평양요한성경학원>

무어 선교사(Moore.j. Zachariah,1874~1963)는 평양의 감리교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반평생을 평양선교에 몸바쳤다. 그는 북한 지역의 감리교 사역자를 양성할 신학교 설립을 꿈꿔왔다. 서울에 협성신학교가 있었으나 이북 지역의 복음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파악하고 평양에 감리교신학교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는 한국선교 35주년이 되는 1938년에 마침내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하였다. 평양의 성경학교 교사를 대찰리 120번지에 8천 평 위에 교실과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그는 한국인 사역자 이환신 목사를 초빙하였으나,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 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다. 무어 선교사는 이를 피하기 위해 학교 이름을 "평양요한성경학원"이라고 하고 1938년 3월 8일에 개교식을 하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이 학교는 총독부로부터 본과 3년, 연구과 3년 과정의 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기에 총독부로부터 학교 설립자가 외국인이 아닌 조선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무어 목사는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이환신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퇴임 후에도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 당시에 일제는 1941년 감리교 연회(총회)를 해산하고 친일 행위를 강요하였으며 교단 이름도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에 합병을 강요하며 일본 교단에 종속시켰다.

이러한 처사는 장로교도 동일하여 일본 기독교단에 강제 흡수되었다. 또한 친일 교단 측은 "요한성경학교"를 접수하려 했으나, 교직자와 학생들이 반대하였으며 일제는 이 학교를 폐교시켰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평양 남산현교회의 여교사 주택으로 이전하여 1년간 마지막 수업을 하고 1944년 봄에 본과와 연구과를 합쳐 1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폐교를 단행하였다. 1938년 이후에는 신차참배 강요로 평양을 비롯한 전국의 학교와 교회들이 자진하여 폐교를 시켰으며 일제에 순응한 학교와 교회들은 운영이 지속되었다.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라빈스 선교사(Robbins, Henrietta P)는 평양 선교부로 파송되어 이북 지역 의 여성 사역자들을 양육하기 위해 1915년 9월 20일에 평양 남산현 주일학교에서 20여명의 여학생을 모집하여 여자 성경학원을 시작하였다. 20여 명의 여학생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1923년에는 독자적으로 학교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초기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특별한 입학 자격이 없어 학생들의 수준이 낮아 어려움이 많았다. 1936년에는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학제를 변경하여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가르쳤다. 이 당시 전교생은 25 명이었다. 라빈스 선교사의 정년 은퇴로 헤인즈(EJ. Haynes) 선교사가 교장직을 이어 맡았다. 1939년에는 학교 인가를 정부로부터 받았으나, 1941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으로 전시 상태에서 힘겹게 운영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그 동안에도 학교는 존속되었다.

<성화신학교>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 이북 지역은 소련군의 군정 하에서도 학교는 운영되었으며 평양 요한성경학교는 폐교되었지만, 평양 여자고등성경학교는 존속되어 이를 더욱 격상시키기 위해 1946년 9월에 "성화신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학생 모집하였다. 이에 약 6백여 명이 지원하였다. 배덕영 목사는 1947년 10월에 서부연회에서 서부연회가 직영 학교로 인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서부연회 직영 신학교로 인가되었다. 1949년에 입학한 학생들이 무사히 졸업을 하였으나, 김일성 공산정권에 비협조적이자 배덕영 목사 교장을 납치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어서 김일성 공산 정권은 평양 장로교 신학교와 통합하도록 강요를 하였다. 이에 박대선 교장 목사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압력에 의해 결국 "평양기독교신학교"라는 교명하에 통합되었다. 이 학교는 1950년 7월 5일에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를 당하였다.

이 학교의 1,2회 졸업생은 모두 31명이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이북 지역에 남아 사역을 하다 순교당한 일부 목사들이 있었으며 대부분 남으로 내려와 이남 지역의 복음화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