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섭 목사는 예루살렘 대학 역사학과에서 고대 성읍,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에서 고대 도로를 11년 이상 연구한 역사지리 학자로 이스라엘 현지에 거주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지역과 지리를 꾸준히 탐사하는 등 이론과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다. 또한 오랜 연구의 결과물을 3D 입체 지도로 제작하는 등 성경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0년 2월 24일 시작되는 성경학습여행 및 기타 문의: 이주섭 목사 (678) 640-6424 Director of Institute of the Biblical Geography (in Georgia Central University)

1. 사무엘과 통일 왕국 시대의 갈릴리
사무엘과 사울 시대에 갈릴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전무하다. 정착 시기에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잦은 충돌은 지파들이 단결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왕정을 수립하는데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충돌은 블레셋 인접한 지역에 제한되었다. 그래서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지역에서 블레셋과의 충돌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왕정 초기인 사울의 활동은 갈릴리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사무엘하 2:9 절에서 이스보셋의 영토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스르엘은 이스보셋 왕국에 포함되었다(1). 그럼에도 므깃도와 이스르엘 전체 그리고 벧산도 블레셋의 수하에 있었다 (삼상 31:10). 사울은 갈릴리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 이스르엘 평야를 자신의 영토로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통치에 블레셋은 언제나 방해가 되었기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사울 왕국은 다윗이 다스리게 되었다. 다윗 때에 이스라엘 영토는 갈릴리를 포함하여 북쪽 리타니 강 (Litani river)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사울과 다윗의 갈등 시기에 갈릴리 지파들의 입장은 거의 확인하기 어렵다. 압살롬 반란 이후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은 사무엘하 20:14-22 절에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갈릴리 북쪽 아벨벧마아가의 한 지혜로운 여인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솔로몬 때에 갈릴리 지역에 대한 내용은 성경과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므깃도와 하솔은 솔로몬 때에 병거성으로 축성되었다 (왕상 9:15). 그리고 솔로몬 때에 갈릴리에 위치한 20 개의 성읍들은 성전과 왕궁을 짓는데 사용된 백향목 값으로 두로 왕 히람에게 양도하였다 (왕상 9:11-14, 대하 8:2). 그 성읍들은 갈릴리 해안 평야와 두로와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솔로몬 시대의 행정 구역에서 이스르엘, 벧산, 요단 계곡의 일부는 솔로몬의 다섯 번째, 납달리는 여덟 번째, 아셀과 알롯 (Bealoth)은 아홉 번째, 그리고 잇사갈은 열 번째 행정 구역으로 편성되었다. 솔로몬의 행정 구역에 관하여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하나는 스불론 지파가 기록에서 빠진 것과 또 하나는 아홉 번째 행정 구역은 지파와 도시가 함께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배경에서 본 구약 시대의 갈릴리 지역
(Photo : 기독일보) 역사적인 배경에서 본 구약 시대의 갈릴리 지역

2. 분열 왕국 시대의 갈릴리
여로보암의 반란으로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주전 732 년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를 점령하기까지 갈릴리는 약 200 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였다. 이 기간의 역사는 주변 국가들 (두로, 시돈, 다메섹, 모압, 에돔, 블레셋)과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 간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지 5 년 후 이집트 시삭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성경에는 시삭의 침공이 예루살렘 (왕상 14:25-28, 대하 12:1-12)에 제한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이집트 룩소르 (Luxor)의 카르낙 (Karnak) 신전에 새겨진 시삭의 원정 기록을 참고하면, 시삭은 갈릴리까지 침략하였다. 이스르엘과 벧산 골짜기에 위치한 다아낙, 수넴, 벧산, 하바라임, 므깃도가 시삭의 원정 기록에서 발견된다. 아울러 시삭의 비문은 므깃도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약 40 년 후 남쪽 유다 왕 아사는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공격에 대비해서 다메섹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벤하닷은 아사의 요청에 따라 갈릴리를 공격하여 북쪽에 위치한 이욘, 아벨벧마아가, 단을 함락하였다 (왕상 15:20). 그리고 벤하닷은 긴네렛 온 땅 (요단 계곡)과 납달리 온 땅 (갈릴리)을 차지하였다. 아마도 하솔의 9 번째 층은 이 시기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이 침공이 있은 지 얼마 후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혼란을 맞게 되었고 정권은 오므리에게 넘어갔다 (왕상 16:8-22).

오므리는 아들 아합을 두로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시키므로 북 이스라엘과 두로는 밀접한 관계을 갖게 되었다 (왕상 16:31, 왕하 8:26). 그러나 이스라엘과 아람 다메섹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아람 왕 벤하닷 2 세는 사마리아를 공격하였지만 아합은 아람 군대를 골란 고원의 아벡 (왕상 20:26)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결국 아합은 아람과의 길르앗 전쟁에서 주전 851 년은 사망하였다 (왕상 22:32-38). 이후 예후의 반란과 아합의 아들 요람의 죽음 역시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 하사엘과 대치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왕하 9:14-27).

같은 시기에 앗수르의 영향력은 갈릴리를 포함한 북쪽 이스라엘에 강하게 미치기 시작하였다. 주전 853 년에 일어난 카르카르 (Qarqar) 전쟁에 관한 살만에셀 3 세의 비문에는 이스라엘의 아합과 다메섹의 벤하닷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앗수르에 저항하기 위해 아합은 전차 2 천대와 보병 1 만명을 파병하였다고 기록하지만, 나아만 (Naaman)은 이 내용을 서기관의 과장된 표현으로 보았다. 나아만 (Naaman)은 전차의 수를 2 백대 또는 앤손 레이니 (A. F. Rainey)는 20 대의 전차를 지원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성경에는 카르카르 전쟁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열왕기상 22:1-4 절을 통해 이스라엘과 아람 간에 잠깐 평화로운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후의 반란 이후 대표적인 사건으로 주전 841 년 살만에셀 3 세의 군사적 원정을 들 수 있다. 살만에셀은 다메섹을 함락하고 계속해서 바알리 라시 (Ba’ali Rasi)를 향해 진격하였다. 바알리 라시 (Ba’ali Rasi)는 아마도 갈멜산으로 추정한다. 살만에셀의 원정 목적은 이스라엘 왕인 예후와 두로로부터 조공을 받기 위함이었다. 바알리 라시에서 살만에셀이 조공을 받은 것과 두로와 이스라엘 간의 종교적인 관계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두로와 북 이스라엘과의 경계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갈멜산은 이스라엘과 두로와의 정치적인 경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이해한다. 두로와 이스라엘과의 긴장에 대해서는 아모스 1:9-10 절에서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아람과의 긴장 관계는 예후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 때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아람 왕 하사엘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이스라엘과 유다 보다 막강하였다 (왕하 10:32-34, 12:18, 13:3-4, 22). 그러나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때에 이스라엘은 아벡 전쟁에서 아람을 크게 무찔렀고 빼앗긴 성읍들을 부분적으로 회복하였다 (왕하 13:17, 25).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 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국경은 북쪽 아람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왕하 14:25-28, 암 6:14). 이스라엘의 지경은 북쪽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이르렀으니 다윗의 영역 가운데 북쪽을 모두 회복한 셈이다. 이는 하부 갈릴리에 위치한 가드 헤벨 출신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에 의해 예언된 내용이기도 하였다 (왕하 15:25).

디글랏빌레셀 3 세의 블레셋 지역으로 향한 군사적인 원정은 주전 734 년에 일어났다. 주전 733- 732 년에 앗수르는 다메섹과 갈릴리를 함락하였다. 당시 앗수르에 의해 함락된 갈릴리 성읍들은 이욘, 아벨벧마아가, 야노아, 게데스, 하솔,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이었다 (왕하 15:29).

디글랏빌레셀의 원정 비문에는 성경에 기록된 성읍 외에 다른 성읍들도 나타난다. 벧네토파 골짜기의 Hi-na-tu-na (Hinatun)와 (Ia)-at-bi-te (Jotbah)가 있으며 Aruma 와 Merom . . . 이곳은 오므리 땅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견고한 도성이었다.

3. 북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갈릴리 (앗수르와 페르시아 시대)
디글랏빌레셀 3 세는 이스라엘 여러 지역을 앗수르 영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각 지역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이름을 따라 앗수르의 행정 구역으로 편성시켰다. 샤론 평야는 Duru (Dor), 요단 동편 지역은 Galaza (Gilead), 그리고 이스르엘을 포함한 갈릴리 지역은 Magiddu (Megiddo)라 하였다. 사르곤 2 세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사마리아 지역은 Samerina (Samaria)로 바뀌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마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이사야 9:1 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후에는 해변 길 (Dor?)과 요단 저편 (Gilead), 이방의 갈릴리 (Megiddo)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당시 갈릴리를 포함한 많은 북 이스라엘 성읍들은 크게 축소되거나 사라졌던 것에 반해 남 유다 왕국의 성읍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 이유는 북 이스라엘 주민들이 혼란 시기를 틈 타 유다로 대거 피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쪽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많은 토기들은 이전의 남쪽 유다 왕국과 비교해서 많은 차이가 있다. 이는 물질 문명의 단절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유다와 갈릴리 지역 간에는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역대하 20:10- 11 절을 통해 알 수 있다: 히스기야는 유월절 절기 때에 사신들을 (사마리아 지역인) 에브라임, 므낫세 그리고 스블론 지역까지 보냈지만 사람들은 이를 농담으로 여겼고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갈릴리 지역인) 아셀과 므낫세와 스불론 지역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겸비하여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요시야 때에 유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므깃도 (왕하 23:29)를 넘어 북쪽 먼 곳까지 확장되었다 (대하 34:6). 역사가인 헤로도투스 (Herodotus)에 따르면, 다리우스 1 세 (Darius I)는 자신의 왕국을 20 개 주 (satrapy)로 분할하였다. 그 20 개 주 가운데 5 번째 주는 시리아, 페니키아, 사이프러스, 유다를 포함하였으며 그 주 이름을 에베나하리 (Ebernahari)라 하였다. 그 뜻은 강 건너 지방 (Beyond the River)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5 번째 주는 다시 몇 개의 지방으로 나뉘어졌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주전 5 세기 선원이었던 Scylas 이 남긴 문서를 통해 확인된다 (Scylas of Coryanda 의 Periplus).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Scylas of Coryanda 를 필사한 주전 4 세기의 pseudo-Scylas 이다. 그 문서에 따르면 두로의 사다리 (the Ladder of Tyre)에서 남쪽 아스글론까지는 모두 두로와 시돈에게 속하였다.

악고와 악고 북쪽에 있는 한 도시 (아마도 악십)는 독립된 자치 도시였다. 악고는 이집트를 견제하기 위한 페르시아 군사 도시로 알려졌다. 고고학적으로 악고는 당시 대단히 규모가 큰 도시였다. 내륙으로는 갈릴리 (아마도 수도는 하솔), 사마리아 (사마리아), 예후드 (예루살렘), 이두매 (라기스), 블레셋 (아스돗), 그리고 요단강 동편은 토비아스 (Tobiads)의 땅 (느 2:10)으로 구분되었다. 트랜스요르단에는 나바티안인들이 살았으며 북쪽으로는 길르앗, 아스다롯 가르나임 (Ashtaroth-Karnaim), 하우란 (Hauran)으로 구분되었다. 이런 행정 구조는 헬라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페르시아 시대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주로 예후드 곧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 (Lod, Arimathaea, AphairemaEphraim)에 거주하였다.

역사적으로 갈릴리 주민들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페르시아 시대에 갈릴리 주민들은 누구였는가? 문화와 인종적인 면에서 갈릴리 주민 대부분은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또는 심각하게 혼혈된 사람들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릴리가 이스라엘 여러 지파에 속한 이후 2 차 성전 시대때까지 갈릴리에 계속 살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미쉬나 시대에 갈릴리 주민들은 대부분 하스모니안 시대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투리안 (Itureans)의 후손과 후에 유대 지역에서 이주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2 차 성전 시대 초기 갈릴리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에 기초한다(2).

고고학적으로 페르시아 시대의 갈릴리 물질 문명은 페니키아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므로 후기 유대 역사에서 갈릴리의 주요 도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1 차 성전 시대의 유대인 후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아닐지라도 하스모니안이 갈릴리를 점령하기 전 갈릴리 지역에 소수의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갈릴리 주민의 이스라엘 기원과 앗수르 점령 이후 유대와의 밀접한 관계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하 30:10-11, 왕하 21:19, 23:36). 반면 갈릴리와 사마리아 간의 문화적인 차이는 그들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의 여러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로 사마리아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지만 갈릴리 지역은 앗수르의 이주 정책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타드모르 (Tadmor)는 주장한다. 어쨋든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의 물질 문명이 동일하든 그렇지 않든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에 지속적으로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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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무엘하 2:9 절에 기록된 이스보셋 왕국에 대하여 알트 (A. Alt)는 아술 (Ashurites)을 아셀 (Asherites)로 읽어야 하며, 이곳은 갈릴리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셀 지파가 갈릴리 해안 지역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아셀 지파가 갈릴리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된 예가 없기 때문에 알트의 주장은 그리 설득력은 없다.
(2) 마카비서에 따르면 반란 초기 갈릴리 주민들은 대부분 이방인들과 소수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마카비상 5:21-23).